BTS 보다 멋진 나

글쓴이 - 조용석 (국제개발새발활동가)

 

모니터링 조사를 위해서 사업 참여자 가정에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무더운 동남아 햇살을 간신히 가려주는 천막 아래에서 나는 미지근한 야자수를 마시면서 사업 참여자와 함께 진행 상황을 점검하고 있었다. 조금 농땡이라도 부릴 생각에 ‘올해는 우기가 참 기네요’, ‘닭들은 잘 크고 있나요?’ ‘오늘 같은 날은 맥주에 돼지 내장 볶음이라도 먹어야 하는데’ 같은 쓸데없는 소리만 늘어놓고 있을 무렵, 때마침 학교를 마치고 딸아이가 돌아왔다. 아이는 어렴풋이 나를 기억하는 듯하더니 수줍게 인사를 하고는 이내 아빠에게 휴대폰을 빌려달라고 했다. 그리고 주저 없는 손놀림으로 유튜브를 틀고는 하염없이 BTS 동영상을 보기 시작했다. 적당한 노닥거리를 찾은 나는 아이에게 “BTS 좋아하니?”라고 물어봤고 아이는 ‘아, 맞다. 이 사람도 한국 사람이었지…’ 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아저씨도 BTS 좋아하시나요?”

“아니, 아저씨는 러블리즈를 좋아한단다.”

 

사업 참여자는 아이가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BTS에만 푹 빠져서 온종일 휴대폰만 들여다본다고 걱정을 했다. 하라는 일은 안 하고 노닥거리고 있는 나는 괜히 머쓱해져서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이 잘못된 일은 아니지 않냐면서 시키지도 않은 항변을 늘어놓았다. 그러다가 시내에 새로 생긴 극장에 BTS 다큐멘터리가 개봉한 것이 떠올라서 아이에게 “시내 극장에서 BTS 영화 상영하던데, 혹시 봤니?”라고 묻자 아이는 사업 참여자인 아빠를 힐끗 쳐다보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아뇨, 아빠가 바빠서요…”

 

이번에는 사업 참여자가 머쓱해 하며 괜히 잘 돌아가는 선풍기를 손으로 툭툭 치면서 시선을 피했다. 8년 가까운 시간 동안 기관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주고 가끔은 식사도 함께하면서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사업 참여자였기에 나는 스스럼 없이 “그럼 주말에 아저씨랑 같이 보러 갈까?”라고 물었다. 아이는 놀란 얼굴로 아빠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며 무언의 허락을 구하였고 이내 사업참여자는 고마움 반 미안함 반으로 괜찮다면 부디 아이와 좋은 시간을 보내 달라고 하였다.

 

아이는 지민의 팬인 모양이었다. 영화가 상영하는 내내 지민이 스크린에 나오면 소리를 질러댔고 덕분에 나도 누가 지민인지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영화가 끝나고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아이는 자리를 떠나지 않은 채 여운을 즐기고 있었고 몇 번이나 극장 앞에 설치된 BTS 등신대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이 잘못된 일은 아니기에, 또한 아이돌을 응원한다는 것이 얼마나 많은 감정을 고무시키는 숭고한 일이고 시시때때로 마음을 벅차오르게 하는 일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에, 이왕이면 나는 그 아이에게 특별한 하루를 선물해주고 싶었다. 극장 옆 책방에서 BTS가 나온 화보를 사주고 나오는 길에 저녁이라도 먹이고 보내줘야 할 것 같아서 무엇을 먹고 싶냐고 물어봤다. 좋아하는 가수의 영화도 보고 화보도 보고 시내까지 나왔으니 마무리까지 확실하게 지어야만 했다. 아이는 한참 동안 생각을 하다가 말했다.

 

“음… 쌀국수(Phở)요”

 

쌀국수를 무시하는 것도 아니고 그것이 이곳 사람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음식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오랜 고민 끝에 나온 것이 쌀국수라는 것에 나는 약간 당황했다. 물론 시내라고 해도 떡볶이를 팔거나 스테이크나 햄버거를 파는 지역은 아니기는 하지만 그래도 내 마음으로는 쌀국수를 저녁으로 사주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쌀국수는 나중에 아빠하고도 먹을 수 있으니 오늘은 저기에 새로 생긴 카페에 가서 새로운 것을 먹어보자고 제안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새로운 경험으로  가득 채운 그 아이에게 오늘 하루가 결코 잊고 싶지 않은 날이 되길 진심으로 바랐다.

 

국제 개발 협력가라면 누구나 들어는 봤지만, 누구도 끝까지 본 적은 없다는 책 『자유로서의 발전』의 저자 아마트리아 센은 ‘역량(Capability)’의 개념을 이렇게 설명한다. 인간의 삶은 하는 것(doing)과 존재하는 것(being)으로 결정되며 물질적인 지원은 여기에 도움을 줄 수 있지만, 그것 자체가 목표가 되지 않는다. 결국 “내가 원하는 바를 성취할 수 있는가?”에 대한 가치 추구 활동이  고려되어야 하는데, 하는 것(doing)과 존재하는 것(being)을 통해서 성취로 이끌어주는 과정(Functioning)이 필요하고 이것을 확장하는 것이 바로 역량이다. 그리고 이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서 많은 국제 개발 기관들이 하는 사업이 바로 경험을 통한 체득이며 교육이다.

 

30대 중반의 아저씨가 10대 어린 학생과 함께 극장에 가는 일은 조심스러운 일이기에 사실 미리 현지 친구를 초대하여 셋이서 하루를 보냈다. 또한, 사업 참여자의 아이와 시간을 보낸 오늘 하루가 추후 사업 성과에 예기치 못한 영향을 주지 않도록 사전에 충분한 설명을 하였다. 그리고 BTS를 좋아하는 어린 학생에게 영화를 보여주고 화보를 선물해주고 함께 저녁을 먹은 일에 대해서 고민했을 때에는, 나는 나중에 이 아이가 오늘의 일을 발판 삼아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품게 되었다. 선택의 폭이 좁았기 때문에 고를 수밖에 없었던 쌀국수처럼, 나중에 그 아이가 무언가를 추구하고 성취하는 과정을 보다 확장되고 더 많은 선택을 할 수 있는 경험이 되길 바랐다. 이쯤 생각하니까 나라는 사람이 제법 괜찮아 보였고 BTS보다 멋지다고 생각했다, 물론 아이 앞에서 그 말을 꺼낼 수 없었지만.